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폰트디자이너 김모은 입니다. 일상과 작업을 공유합니다. ◇ □ ◇ ○ → 모두모은

[밤에 있었던 일-1] 아는 고양이가 생겼다.

  • 2023.05.03 05:14
  • essay


거진 3주째 새벽 줄넘기를 뛰고 있다.
2019년에 처음 시작했던 건데, 계속하려고 했지만 겨울엔 도저히 할 수가 없는 운동이라 유지하지 못하고.. 간간히 하다 말다 했던 것을 이번엔 제대로 마음먹고 시작했다.
봄에 시작했으니 겨울까지 한참 오래 유지할 수 있을 거다.

모두가 잠든 새벽에 집을 나선다는 건, 조금 무섭기도 하지만 분명 낭만적인 일이다.
삼십 분 남짓의 나들이지만 아무런 상념 없이 몸을 움직이다 보면 평소에 모르고 지나쳤던 것들이 보이기 마련이다.
그래서 새벽 시간을 사랑한다.

-
그간은 새벽에 있었던 작은 일들을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남기곤 했지만, 보는 친구들이 새벽에 나돌아 다니는 것을 불안해하는 탓에 블로그에 소소하게 남겨보고자 한다.
그래도 여기에 적는 건 현장감이 덜 하달까. 좀 낫지 안.. 나..?

금새 다음 장으로 넘어가버리는 스토리에 올리면 보는 사람도 불편하고. 잘 기록해 뒀다가 나중에 일상툰 같은 거라도 하게 될지 또 모르지.

빠르게 지나가버리는 젊은 날이니 기억해두고 싶기도 하고.

 


 

 


오늘은 나가던 길에 노란색 얼룩무늬 고양이를 만났다.
음식물 쓰레기를 뒤지려는 참이길래, 가지고 다니던 츄르를 뜯어서 건넸다.
딱 두 번째 보는 사이였던 지라, 경계심이 많았다.
츄르를 뜯으려는 와중에도 겁을 먹어서, 내가 낼 수 있는 최선의 예쁜 목소리로 겁먹지 않게 말을 걸어줘야 했다.

몸을 최대한 낮추고 쭈그려 앉아서, 너 먹을 거라고 손을 내민 채 한참 눈을 맞췄다.
그래도 머리 긴 여자한테는 경계심이 적다는 이야기 어디서 들었는데.. 그래서인지 손에 든 츄르 냄새가 좋아서인지.. 고양이는 금방이라도 다가올 것처럼 고개를 내밀었다.

거의 다 된 거였는데.


갑자기 내 뒤로 까만 젖소냥이가 다가오는 바람에 내가 너무 놀라버렸다.
소리도 없이 뒤에서부터 다가와 내 오른쪽 무릎에 몸을 딱 붙이고 서서 노란 냥이와 눈을 맞추던 녀석..
서로 싸우지는 않았지만, 굳이 스킨십을 할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. 노란 녀석은 까만 녀석 때문에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. 까만 녀석도 내게 몸을 붙이고 이 인간은 나랑 아는 사이라고 어필하는 듯했다.
그리곤 뻔뻔하게 내 손에 있던 츄르를 핥던 까만 녀석..


-
사실 이 까만 젖소무늬 고양이는 정말 작던 아기 시절부터 이 빌라 주변에 터를 잡고 살던 애다.
나는 지나가며 그 작은 녀석을 자주 봤지만, 경계하며 맨날 도망만 쳐서 조금 속상했더랬다.

그 뒤로 나도 바빠져서 못 본 지 거의 2년. 어느덧 어른 고양이가 된 녀석과 다시 안면을 트게 된 건 졸업전시가 끝나고부터였다.
주에 하루쯤은 아침이나 밤 출퇴근 길에 이 녀석을 만났다.
25년 평생 고양이와 친분이란 걸 쌓아본 적 없는 나는, 그저 녀석이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최대한 무해한 포즈로 손인사만 하며 지나갔다. 쫌 찌질해보이는 모양새다.

그러다 새벽 줄넘기를 시작한 요 근래 거의 매일 새벽 이 녀석을 같은 자리에서 만났고, 처음 일주일은 아는 체만 겨우 해주던 녀석이 요 근래 손을 허락하고.. 떠나는 길에 조금 따라도 와 주는 사이로 가까워졌었다.

▲ 며칠 전, 자리를 뜨려는데 다가오던 녀석


나름 가까워진 줄은 알았지만, 오늘 이렇게 뒤에서 먼저 다가와줄 줄은 몰랐다.
나는 이 녀석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..
내가 맨날 아는 척해서 내심 귀찮을 줄 알았는데..

정말이지 감동이었다.
내가 얼굴을 보여주지 않아도, 냄새와 목소리를 알아듣고  내게 와준 녀석이 너무 고맙다. 경계도 하지 않고 말이야..
저 작은 머릿속에 내 자리가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하다..

눈물겹다는 게 이런 걸까..


처음 경계할 때, 같은 츄르를 한두 번 뜯어준 적이 있다.
그때는 먹는 둥 마는 둥, 핥기만 하고 가길래 배가 부른가 보다∼했지. 근데 오늘은 몇 번 핥아보더니 잘 먹는 것이 아닌가..
내가 주는 밥까지 먼저 와서 먹을 정도로 친해졌다는 게 정말.. 너무 기쁘다..



마지막 한 입을 남겼길래, 노란 고양이가 사라진 개구멍 쪽에 놔주었다. 그러곤 한참 까만 녀석과 놀았는데, 노란 녀석이 고개를 빼꼼. 하더라. 츄르 먹으러 나온 모양이었는지.. 근데 까만 녀석이 저러고 다시 집어넣어 버림. 너네 뭐냐 왜 그러냐...



까만 녀석은 그 뒤로도 한참을 엉뚱한 짓을 했다. 나무 화단에 스크레치를 하지 않나, 온갖 곳에 볼을 비비고...


고양이답게 버려진 박스를 탐색하더니 들어앉더라.
귀여운 자식....



그리곤 내 운동가방에 볼을 부볐다.
만나면 꼭 저런다. 저 쇼핑백이 마음에 드는 가보다..


난데없이 몸도 굴리던 녀석..
어제 내 앞에서 저러길래 배를 마구 긁듯이 쓰다듬어줬었는데, 좋아하더라. 폰 꺼내면 안 할까 봐 못 찍은 게 천추의 한이다.



그러다가, 골목 저 멀리서 작은 소리가 나더니 다시 경계모드. 작으신 할머니가 걸어 나오길래 위험해 보이지 않아서, 괜찮다고 말해줬지만 먹히지 않았다.
차 뒤로 숨어 들어가길래 나도 걱정이 되어서 따라갔다. 계속 숨어 들어가던 녀석..

 


완전한 자기 구역으로 들어가서, 할머니 나오는 걸 계속 보던 녀석.
마지막 코인사를 하고 일어나는데, 할머니가 내 뒤쪽에서 녀석을 보며 서 계셨다. 조금은 어색한 상황.. 상호 머뭇거리다가, 가벼운 목례를 하고 지나치려는데 말을 거셨다.

"쟈는 날 보면 깨물고 도망쳐 허허"

투박하게 고양이에게 다가서시는 모습을 보니, 이유를 알 것도 같고..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.
내 손 가득 반지를 보고 얘쁘기도 하다며, 비싼 거냐고 물으시던 할머니.
순간 '이 각박한 세상에 비싼 거라고 하면 나 어디 팔려가는 거 아녀' 하는 생각이 들어 순간 무서웠지만, 실제로 비싼 건 하나도 없어서 "아니에요 다 싸구리예요 하하" 하고 웃어넘겼다.
"젊을 때 멋 잔뜩 부려. 늙으면 다 소용없어" 하시던 할머니.
"아니에요 고우신데요∼"답했더니 머쓱하셨는지 대답 없이 고양이에게로 다가가셨다. 어디로 갔는지 본다며..
당연히 녀석 개빠르게 도망침

좋은 밤 되시라고 하고 떠나왔는데, 조금 더 말동무를 해 드릴 걸 그랬나 싶다.
이 야심한 새벽에 고양이 때문에 사람을 만나고, 짧지만 따뜻한 대화를 나눈 것이 멋지게 느껴졌다.

그리고 고양이에게 '아는 인간'으로 확실히 인정받은 밤이라,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.
내나 들려오던 조용한 피아노음악 소리까지 더해져 무슨 애니메이션에 나올 법 한 멋진 장면들이었다.

고양이 두 마리와 할머니 생각에 오늘 밤은 왠지 더 밝은 느낌이었고, 뛰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.




노란 고양이를 위해 두었던 츄르는 운동을 마치고 돌아고는 길에 회수했다. 누가 먹었는진 알 수 없지만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.

+
이런 멋진 날에 여담으로는 어울리지 않지만.. 저 츄르.. 지갑이나 가방에 휴대하기 좋아 보여서 샀는데 어느 날 갑자기.. 생긴 게.. 좀.. 수상하게 생겼다... 는 생각이.. 들더라..... 마치.... 그... 무엇처럼.. 생겼다는 생각이 들어서..... 엄청.... 민망한... 그렇지만 분명히 츄르다.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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